歷史

[스크랩] 우리는 언제부터 일본에 뒤지게 되었을까?

海天(이수부) 2016. 9. 9. 11:43

우리는 언제부터 일본에 뒤지게 되었을까?

조선에는 없고 일본에 있던 것들

최소 임진왜란 전까지는
조선이 일본보다 앞서

두 나라의 운명 바꾼 건
세계변화 엇갈린 대응
상공업 우대정책•리더십


[김대기 KDI정책대학원 초빙교수]

기록을 보면 최소한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우리가 더 앞선 것 같다.
당시 조선은 일본을 오랑캐 취급했으니까.
1592년 왜선들이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왔을 때
형님나라에 조공 바치러 오는 줄로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왜군 선봉장 고니시가 한양에 입성하면서 뱉은 첫마디는 "보귀롭다"였다.
성벽과 기와집들의 조형미에 감탄한 것이다.
그만큼 조선의 수준이 일본을 앞지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조선이 어쩌다가 일본에 뒤지게 되었을까?
가장 큰 요인은 세계 변화 흐름을 타지 못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세계는 두 번의 큰 변화를 겪는다.
첫째는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고,
둘째는 산업혁명이다.
대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누가 먼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따라가느냐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던 시대이다.

일본 역시 임진왜란 이후 내부 안정을 위해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선진국인 네덜란드와 무역을 위해 나가사키항은 열어두었는데
이것이 신의 한수였다.
여기서 유입된 선진문물이 일본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지식층들은 의학, 천문학 등에 감탄하면서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열풍까지 불었다.
쇼군 역시 늘 세계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17세기 조선은 대륙의 주인이 청나라로 바뀌는데도
명에 대한 충성만 고집하는 우를 범했다.
선진문물이 중국을 통해 들어왔는데 청나라를 오랑캐 취급하면서
그 통로를 스스로 닫았다.
수명을 다한 성리학에 젖어 당파 싸움, 예송 논쟁이나 벌이면서 세월을 보냈다.

19세기 들어서도 조선은 세상 돌아가는 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수천 년간 우상이던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조그만 영국에 무참히 깨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미국에 혼나면서 서구와의 엄청난 기술격차에 놀란다.
결국 1868년 무능한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시대로 가면서
세계 변화 흐름을 적극 수용한다.

조선이 뒤진 두 번째 이유로는 상공업에 대한 시각이 없어서다.
조선은 사농공상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상공인을 무시했다.
일본은 상공인을 우대했다.
조선에서 천민 취급을 받던 도공들을 최고계급인 무사로 대우해준 것이 좋은 예다.
그들이 결국 도자기 수백만 점을 수출해서 부를 쌓은 주역이 되었다.

19세기 일본은 유럽식 공장을 마구 유치하고,
장관 월급의 3배를 주면서 외국 전문가들을 모셔왔다.
기업을 키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이때 미쓰비시, 미쓰이 등 근대 기업들이 탄생했다.
그 결과 메이지유신 이후 불과 30년 만에 국력이 급격히 신장하면서
세계 열강에 합류했다.

세 번째 요인은 정치 리더십에서 갈렸다.
일본 지도층의 국가 발전에 대한 의지는 대단했다.
1871년 100명이 넘는 관료를 구미 선진국에 2년간 시찰을 보냈다.
이들이 보고 배워온 선진 제도와 산업화 전략이 일본을 급속도로 발전시켰다.
민법, 상법 등 근대 법체계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19세기 조선은 순조 헌종 철종 등 존재감 없는 왕이 세도정치에 휘둘리면서
관료체제가 무너지던 시기이다.
일본의 인재들이 해외문물을 습득하는 동안 조선의 인재들은 낙향하여
시서화나 그리고 있었으니 나라가 잘될 리 없었다.

종합해보면 조선은 세계 변화의 흐름에 무심했고, 상공업을 경시했으며,
국가 리더십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당했다.
아주 처참하게.

역사는 반복한다.
무늬는 바뀌어도 본질은 같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세계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가?
상공인을 우대하고 있는가?
인재를 잘 활용하고 있는가?
관료 제도는 잘 작동하고 있는가?
정치 리더십은 믿을 수 있는가?

지금 돌아가는 행태를 보면 우리나 조상들이나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소녀상을 세우고 독도에 가서 만세삼창 부른다고 일본을 이길 수 없다.
우리 DNA를 바꾸지 않으면 언젠가는 또 당한다.

 

 


'슬픈 기적'이 되어가는 한국의 성공 신화

이두원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이두원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최근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지원을 받아 베트남 정부에 한국의 발전 경험을
종합적으로 전수하는 DEEP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개도국 지도자들을 교육할 기회가 자주 있는데 그들이 공통으로 묻는 것이 있다.
'2000년대 이전 한국은 어떤 정책을 써서 발전했는가?'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성장에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안다.
이들이 정말 궁금해하는 것은 이런 정책들을 과거 한국 정부가 어떻게 집행했느냐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답이라며 과거 권위주의 정부가 값싼 노동력을 활용해 고도성장을 했다고 폄훼한다.
개도국 지도자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권위주의 체제와 값싼 노동력은 모든 개도국이 가진 공통분모인데
유독 한국만 발전에 성공했으니 그 비결을 알고 싶다는 것이다.

'과거 한국 지도자들은 경제 발전에 대한 강한 의지로 정책 집행을 밀어붙였다'
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많은 개도국 지도자도 과거 우리 못지않게 성장 의지가 강렬하다.
그럼에도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는 것은
정책을 현실에서 구현할 전문 관료들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은 고시 제도를 통해 지연, 학연,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관료로 선발했다.
이들을 실적으로 평가해서 승진시켰으며 정치 지도자는
이들을 각종 이해집단의 압력 및 정치적 입김에서 보호했다.
또한 정책 일관성을 유지해 정책 신뢰도를 높였으며,
정책 간 충돌이 발생하면 탁월한 조정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관료들은 지도자가 제시한 방향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일했다.
기업인들 역시 정부의 독려와 지원을 받으며 자신감을 가지고
투자와 기술 개발, 수출 시장 개척에 매진할 수 있었다.
정치 지도자의 의지와 관료의 역량, 기업인의 헌신이 삼위일체가 돼
한국 경제의 발전을 이끈 것이며,
바로 이 점이 권위주의와 값싼 노동력만을 가진 다른 개도국들과 달랐다.

개도국 지도자들에게 이런 설명을 하다 보면 나 스스로 우리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어난다.
사실 앞서 강조한 사항들은 말이 쉽지 실천하기는 정말 어렵다.
더욱이 1960~70년대 척박한 환경에서 이를 구현하였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에 가깝다.

현재 한국 경제 상황을 돌아보면,
과연 우리가 개도국들에 이런 조언을 해줄 자격이 있나 자성하게 된다.
지난 10여년, 한국 경제는 앞서 강조했던 삼위일체의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 기조가 바뀌다 보니 정책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이번 추경안의 파행적 처리에서도 알 수 있듯, 중요한 경제정책이 정치 논리의 희생양이 되곤 한다.
게다가 실 적에 대한 보상보다는 실패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 잔뜩 웅크린 관료 집단의 모습은
이제 거의 희망이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정책 조정 능력 역시 의심스럽다.
가령 투자 활성화를 부르짖으며 각종 규제를 남발하는 식이다.
이런 현실을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지금은 우리가 남을 가르칠 때가 아니라,
우리야말로 선배들에게 배워야 할 시기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출처 : 스마트한자
글쓴이 : 海天 李秀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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